영월읍내에 위치한 '장릉(莊陵)'입니다.
17세 어린 나이에 사약(賜藥)을 받고 숨진 조선 제6대 임금, '단종(端宗)'의 능(陵)이지요.
단종은 부왕인 문종이 일찍 죽어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권을 빼앗기고 영월의 청령포로 유배되었다가 사약을 받고 죽지요.
단종이 죽었을때 시신을 거두는 이가 없자 영월호장(寧越戶長) 엄흥도(嚴興道)가 수습해 암장한 곳이 바로 이곳 이랍니다.
단종(端宗 1441-1457)), 비운의 어린 왕(王)입니다.
영화로도 여러번 제작되고 방송드라마로도 널리 알려진 비운의 왕입니다.
이름은 '홍위(弘暐)'이고 문종의 아들로 세종 23년(1441)에 태어 납니다.
세종30년(1448)에 왕세손(王世孫), 그리고 세종32년에 왕세자(王世子)로 책봉이 됩니다.
부왕 문종이 재위 2년만에 승하하자 뒤를 이어 12세의 어린 나이로 1452년 경복궁에서 즉위를 합니다.
단종원년(1453)에 숙부 수양대군이 계유정란(癸酉靖亂)을 일으켜 국권을 장악합나다.
단종3년 상왕(上王)으로 물러나 앉습니다.
세조2년(1456) 사육신(死六臣)의 단종복위운동이 실패하자 '노산군(魯山君)'으로 감봉되어 영월 청령포로 유배가 되지요.
1457년 경상도 순흥에 유배되었던 금성대군의 단종복위 모의사건이 터집니다.
그해 10월24일 사약(賜藥)을 받습니다.
영월호장 엄흥도가 시신을 수습해 동을지산(冬乙旨山)'인 이곳에 몰래 매장을 합니다.
숙종7년(1681) 대군(大君)으로 추봉되고 숙종 24년(1698)에 복위되어
묘호(廟號)를 '단종(端宗)'으로 하고 능(陵)을 '장릉(莊陵)'이라 합니다.
사후 241년만에 왕실의 정례(正禮)를 되찾은 것이지요.
장릉(莊陵)은 다른 왕릉과는 조금 다른 모양을 갖추었습니다.
단종에게 충절을 바친 신하들의 위패를 모신' 배식단사(配食檀祠)'와
'장판옥(藏版屋)', '정려각(旌閭閣)'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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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분주위의 석물(石物)들도 다릅니다.
석호(石虎)와 석양(石羊)이 각각 한쌍 씩만 배치되어 있고
봉분앞에는 상석(床石)과 사각옥형(四角屋形)의 장명등(長明燈)이 세워저 있습니다.
그리고 능 양쪽에는 망주석(望株石) 2기와 문인석(文人石)2기, 석마(石馬) 한쌍이 세워저 있고 무인석(武人石)은 없습니다.
다른 왕릉의 망주석들은 동물 형상의 세호들을 갖추고 있는데
이 장릉의 봉분 좌우 망주석은 세호가 없습니다.
조선 왕릉 가운데 세호가 없는 유일한 망주석 입니다.
'장릉 안내도'를 그대로 복사했습니다.
입구에서 우측 언덕길로 따라 오르면 바로 장릉에 도달합니다.
아랫쪽 넓은 길을 따라 들어서면 부속건물들과 제례시설들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입장권을 구입한후 정문으로 들어 섭니다.
왠지 왕릉 정문같지 않아 조금은 생소합니다.
제례시설들로 향하는 초입에 세워진 건물입니다.
'낙촌비각(駱村碑閣)'이라는 현판이 붙어있습니다.
충신 '박충원 정려각(朴忠元 旌閭閣)'입니다.
이 비각은 박충원(朴忠元)의 충신됨을 널리 알리기위해 1973년에 세워젔다구요.
중종11년(1516) 노산묘(魯山墓)를 찾으라는 어명에 의해 노산묘를 찾아 치제를 하였으나 그후 방치되었던 것을
중종 36년(1541) 영월군수로 부임해온 박충원의 현몽에 의해
새롭게 봉축(封築)하고 전물(奠物)을 갖추고 제문을 지어 치제를 했었다는군요.
박충원은 중종 26년(1531) 문과(文科)에 급제하였고
사후에 '문경공(文景公)'이란 시호를 받습니다.
'단종역사관'입니다.
단종의 탄생과 유배, 죽음과 복권에 이르는 단종 관련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재실(齋室)'입니다.
건립년대는 확실치 않으나 1932년에 중건을 했다구요.
능참봉과 수호군 9인이 기거를 했고 매년 단종 제사를 지낼때 이곳에서 제물을 준비하고
도 제기를 비롯한 각종 사용기구들을 보관해 오던 곳이랍니다.
두 그루의 향나무 고목이 우람합니다.
'엄흥도(嚴興道) 정여각(旌閭각)'입니다.
엄흥도(嚴興道)의 충절을 후세에 알리기 위해 영조2년 (1726)에 세웠다구요.
충신 엄흥도가 영월호장(寧越戶長)으로 재직하고 있을때에
단종이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 유배되어 1457년 10월24일 사약을 받고 죽었답니다.
강물에 버려진 단종의 시신을 거두는 자는 삼족(三族)을 멸한다는 어명에도 불구하고
가족과 함께 시신을 수습해서 암장을 했다구요.
순조33년(1833)에 공조판서(工曺判書)로 추증되었고 고종13년(1876)에 '충의공(忠毅公)'이란 시호를 받았답니다.
'장판옥(藏版屋)'입니다.
단종을 위해 목숨을 바친 충신위(忠臣位) 32인, 조사위(朝士位)186인, 환자군노위(宦者軍奴位)44인, 여인위(女人位)6인을 합하여
268인의 위패를 모신 곳입니다.
정조 15년 (1791)에 건립되었다구요.
'배식단(配食檀)'입니다.
단종을 위해 목숨을 바친 충신위,조사위,환자군노위,여인위의 영령을 추모하기위하여
매년 단종제향을 올린후 제사를 지내는 제단(祭檀)입니다.
'홍살문'입니다.
신성한 지역임을 알리는 문이지요.
붉은 칠을 한 둥근 기둥 2개를 세우고 위에는 화살을 박아 놓았습니다.
'홍문(弘門)'이라고도 하고 '홍전문(弘箭門)'이라고도 합니다.
'정자각(丁字閣)'으로 이어지는 참도(參道)'입니다.
왼쪽의 약간 높은 길은 신(神)이 다니는 길이라해서 '신도(神道)'라 하고
오른쪽 약간 낮은 길은 임금이 다니는 길이라 하여 '어도(御道)'라고 하지요.
홍살문에서 정자각에 이르는 참도는 일반적으로 일자형으로 조성되어 있는데
이곳 장릉의 참도는 'ㄱ'자 형으로 꺽이어 있습니다.
처음부터 왕릉으로 택지된 곳이 아니다보니 지형에 따라 조성되어 그렇답니다.
'정자각(丁字閣)입니다.
영조9년(1733)에 지어젔다구요.
제향(祭享)시 제(祭)를 올리는 곳입니다.
'丁'자 모양으로 건립된 제전(帝殿)이어서 '정자각(丁字閣)' 또는 '배위청(拜位廳)'이라고 부른답니다.
'단종비각(端宗碑閣)'입니다.
영조9년(1733)에 어명으로 '단종대왕릉비(端宗大王陵碑)와 비각(碑閣)이 '정자각', '수복실'과 함께 지어젔다구요.
비석 앞면에는 조선국 단종대왕장릉(조선국 단종대왕장릉)'이라는 글이 음각되어 있고
뒷면에는 단종의 생애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수복실(守僕室)'입니다.
능과 경내를 관리하는 능지기가 기거하는 곳이지요.
영조 9년에 정자각과 함께 지어젔다구요.
'영천(靈泉)입니다.
장릉 서쪽편에 위치해 있습니다.
정조15년(1791)에 어명으로 영월부사 박기정(朴基正)이 수축하여 제향시 제정(祭井)으로 사용했답니다.
보통때는 조금씩 샘물리 솟았으나 제향을 지낼때에는 물이 많이 용출했다구요.
우물깊이, 1.5m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