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오며가며

의녀(義女) 주논개(朱論介)의 의행(義行)

by 鄭山 2007. 5. 14.

수주(樹洲) 변영로(卞榮魯)선생이 쓰고 정태준(鄭泰俊)선생이 곡을 부친 "논개",

논개찬가(論介讚歌)입니다.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 깊고

        불붙는 정렬은 사랑보다 강하다.

        아- 강낭콩 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위에  

        양귀비꽃 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아리땁던 그 아미 높게 흔들리우며

        그 석류속같은 입술 죽음을 입마추었네

        아- 강낭콩 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위에

        양귀비꽃 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흐르는 강물은 길이길이 푸르러라

        그대의 꽃다운 혼 어이 아니 붉으랴 

         아- 강낭꽃 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위에

         양귀비꽃 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논개(論介)는, 성은 주씨(朱氏)이고 본관은 중국 신안(新安)이고,

전북 장수(長水)에서 태어 났다고 하지요.

원래 양반의 딸이었으나 아버지가 죽고 가세가 기울면서

경상북도 병마절도사 최경회(崔慶會)의 후처가 되었다고 합니다.

1593년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이 함락되고 최경회가 자결하자 ,

왜장들의 진주성함락 촉석루(矗石樓) 자축연에 기생으로 위장 참석해서

계획대로 열손가락 마디마디에 반지를 끼고서

술에 취한 왜장(倭將)  게아무라 로구스케(毛谷村六助)를 꾀어 벽류(碧流)속 바위에 올라

껴안고  남강(南江)에 투신해 함께 죽었다고 했지요. 

훗날 그 바위를 의암(義巖)이라 불렀고 사당(祠堂)을 세워 나라에서 제(祭)를 지냈다고 했읍니다.

 

바로 그 의암(義巖)입니다.

논개가 진주성을 함락시킨 왜장을 껴안고 남강으로 몸을 던젔다는 그 순국의 현장입니다.

 

 

 의암 사적비(義巖事跡碑)입니다. 

 

안내 현판에 따르면 '의기 논개(義妓 論介)의 사적을 기록한 비석' 이라고 쓰여저 있읍니다.

(앞서 '기생으로 위장하여 왜장들의 진주성함락 자축연에 참석했다'고 썻는데,

진주시에서 세워놓은 안내현판에는 아예 기생으로 단정해서 기술되어 있네요.어느쪽이 맞을까요?

논개가 기생이었느냐 아니면 기생으로 위장해 잠입한 여염집 여인이냐? 논란은 진행중인듯 합니다.

그런데 진주시와 시민들은 기생신분으로 믿고 있는게 아닐까 싶네요.) 

 

그리고 비문에는 이런 시(詩)가 새겨저있다고 안내현판에 기술되어 있구요.

 

       그 바위 홀로 서 있고 그 여인 우뚝 서 있네

       이 바위 아닌들 그 여인 어찌 죽을곳을 찾았겠으며

       이 여인 아닌들 그 바위 어찌 의롭다는 소리 들었으리요

       남강의 높은 바위 꽃다운 그 이름 만고에 전하리 

 

 

의기사(義妓祠)입니다.

논개의 위패와 영정을 모신 사당입니다.

 

 

 의기사(義妓祠)라면 의로운 기생을 기리는 사당이라는 말인데,

논개는 기생으로 가장해 왜장들의 자축연에 참석한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최경회의 후처였다면서

어찌 '의기사'로 불리울까요?

 

'의기사'는 처음 영조5년(1739)에 지어젔다가 정조4년(1780)에 보수되고

순조 24년(1824)에 중건되었다는데, 당시  관찰사 이지연(李止淵)에 의해

현판이 '의랑사(義娘祠)로 바뀌어 부쳐 젔다고 하지요?     

의랑사(義娘祠)라면 '의로운 낭자를 기리는 사당'이라는 뜻이죠?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한국전쟁때 불타버린 이곳이 1956년 시민들의 성금으로 복원이 되는데 그 때 다시

그 의기사(義妓祠)현판으로 되돌아가 부쳐 젔다는 얘기 아닙니까?

복원을 했던 진주시민들이 논개는 의로운 낭자가 아니고 의로은 기생이 확실하다고

결론을 내렸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 아닙니까?

식민사관에 의한 오판인가?

아니면, 논개가 실제로  병마사 최경회의 애첩 신분 기생논개였다는 말인가?

진주 시민들이 걸어놓은 현판이니까 후자가 맞을런지도 모르지요.

 

 

촉석루(矗石樓)입니다.

진주시의 상징이며 영남 제1의 명승입니다.

 

전쟁때는 주장(主將)의 지휘소였고, 평시에는 선비들이 풍류를 즐기던 곳 이었다지요.

 

임진왜란의 아픈 상처속에는, 왜장들의 진주성 함락 자축연이 있었던 장소였으며

의녀 논개가 기생으로 위장, 참석해  적장을 끌어안고 순국하게한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지요.

 

고려 고종때 창건된 이후 지금까지 7차례 중건, 중수되었다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