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이천시 모가면 어농3리 322-4
'어농성지'입니다.
한국교회 최초로 성직자를 영입해 오기 위해 중국을 두번씩이나 다녀온 윤유일(바오로)와
그의 파평 윤씨 일가족,
그리고 그 동료 순교자들의 묘가 모셔저 있는 곳입니다.
이곳 어농성지는 17분의 순교자들을 현양하고 있습니다.
1795년 을묘박해 당시 순교한 최초의 밀사 윤우일(바오로)와 지황(사바), 최인길(마티아)를 현양하고
1801년 신유박해당시 순교한 주문모(야고보)신부를 위시해서 윤우일의 아우 윤유오(야고보),
사촌여동생 윤점혜(아가타), 윤운혜(루치아) 정광수(바르바라) 부부,
그리고 이들과함께 주문모신부를 도왔던 여회장 강완숙(골롬바)와 경기도 출신으로 신유박해때 순교한
조용삼(베드로), 원경도(요한), 최창주(마르첼리노), 이중배(마르티노), 심아기(바르바라),한덕운(토마스)
그리고 강완숙 여회장의 아들 홍필주(필립보)등 모두 17분의 순교자들이 모셔저 있습니다.
(아래 사진은 파평 윤씨 일가족의 묘소입니다.그 가운데 윤유일의 묘도 있습니다.)
'어농성지'입구에 들어서면서 왼쪽으로 순교자 현양구역입니다.
14처를 지나며 현양구역 에 이르면 입구 오른쪽에 성모상이 모셔저 있읍니다.
그리고 왼편에 고난의 밀사 윤유일(尹有一,바오로)의 치적비가 세워저 있고 동상이 그 뒤로 세워저 있습니다.
최초의 밀사 윤유일(바오로)는 파평 윤씨 27대 후손으로 대학자 권철신(權哲身,암브로시오)에게서는 학문을 배우고 권일신(權日身,암브로시오)에게서는 천주교리를 배워 영세,입교하셨답니다.
1789년, 신부를 모셔오기 위해 최초의 밀사로 선발되어 북경에 잠입합니다.
구베아(Gouvea, 湯士選)주교에게 밀서를 전하고 한국교회의 탄생을 고하고 신부파견을 요청합니다.
다음해 1790년, 다시 북경을 방문합니다.
1795년 을묘박해때 순교합니다.
아래사진은 그분의 묘소(가묘)입니다.
최초의 조선 선교사 주문모(周文謨,야고보)신부의 동상입니다.
북경교구 주베아 주교는 북경신학교 1회 졸업생 주문모(야고보)신부를 조선선교사로 파견을 합니다.
1794년,두번째 밀사 지황(池璜,사바)의 도움으 받아 압록강을 건너
윤우일(바오로)와 최인길(崔仁吉,마티아,통역)의 영접을 받으며 조선에 입국을 합니다.
1795년 부활대축일을 맞아 첫미사성제를 올렸고 교우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구요.
밀고자의 신고로 포졸들이 최인길의 집을 급습했으나 최인길이 중국인 신부행세를 하는 사이
주문모신부는 여회장 강완숙(姜完淑,콜롬바)의 집으로 대피할수 있었다는군요.
최인길이 중국인 신부행세를 한것이 발각되면서 최인길, 윤유일, 지황이 체포돼 1975년 6월28일 순교합니다.
그후 6년여동안 주문모신부는 당시 집수색을 할수없었던 양반댁과부 강완숙의 집에
은거하면서 강완숙의 도움을 받아 밤을 이용해 사목활동을 펼첬답니다.
주문모신부는 1801년, 의금부에 자수, 새남터에서 순교를 하셨답니다.
1790년 윤유일이 두번째 북경에 갔을때 구베아주교로부터 포도나무 한그루와 그 재배법, 포도주 만드는 법을 배워왔다고 했지요.
주문모 신부의 조선 입국 첫번째 부활절 미사때 사용된 포도주는 5년전 윤유일이 가져와 가꾼 포도나무에서 수확한 포도로 만들었다고 전해지지요.
순교자 묘역 건너편에 가건물형태의 성당이 있습니다.
또다른 성모상이 세워저 있습니다.
성당 전면에 자리한 아버지상(像) '아버지!', 감동적입니다.
십자가 동산도 조성되어 있습니다.
순교자묘소구역과 미사구역 가운데 조성되어진 생태농원을 따라서 십자가의 길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성당옆 언덕위에 예수성심상이 아래쪽 광장을 향해 위치하고 있읍니다.
뒤편 언덕을 따라서 형구체험장이 있고 이송용 달구지, 형틀, 방두(方斗)등 형구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1795년 부활절이 지난 어느날 밀사 윤유일과 최인길, 지황는 끝내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주신부의 행방을 찾는 고문속에 순교를 합니다.
시신은 시구문(광희문)을 지나 살곳다리(지금의 한양대 동쪽)부근 강물에 뿌려집니다.
(시신은 찾을수 없어 어농성지의 무덤은 가묘입니다.)
고난의 밀사 윤유일의 순교는 결국 파평 윤씨 집안을 순교집안으로 만듭니다.
1801년 박해가 일어나면서 부친 윤장과 숙부 윤현이 체포되어 유배형을 받았고 숙부 윤관수(안드레아)는
순교를 합니다. 윤유일의 아우 윤유오, 사촌누이 윤점혜(아가다)와 윤운혜(마르타), 운혜의 남편 정광수
(바르나바)도 순교를 합니다.
한편 4월19일에는 교우들이 그토록 숨기려 애썼던 주문모신부가 더 이상의 희생을 볼수없다며 자수,
새남터에서 순교를 하게되고
5월23일에는 강완숙 회장도 서소문밖에서 순교를 합니다.
윤유일 일가는 그 후손들이 뿔뿔이 흩어저 200여년동안 소식이 없습니다.
그러던중 1987년에 이르러서야 후손중 한분인 윤필용씨의 행적을 찾게 되고
그분의 증언에 따라 윤씨일가의 선산안에서 윤유일의 조부, 부친, 동생 윤유오의묘를 확인하게 됩니다.
어농리 파평윤씨네의 선산이 성지로 조성되기 시작합니다.
윤유일이 모셔온 주문모신부, 동정녀 공동체의 회장 윤점혜, 여회장 강완숙의 묘도 함께 조성이 됩니다.
'어농성지'의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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