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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며가며

동해 약천사(藥泉祠)

by 鄭山 2007. 11. 5.

             "동창(東窓)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소치는 아희놈은 상긔아니 일었느냐

              재너머 사래긴밭을 언제 갈려 하느니"

 

지금은 잘 모르겠지만, 우리가 초등학교 다니던 시절, 교과서에 나오던 시조 였습니다.

그러니까, 아주 낯익고 널리 애송되던 시조 였지요.

약천(藥泉) 남구만(南九萬)선생의 시조였습니다.

 

                       (약천마을 '약천사' 입구에 세워진 '동창이 밝았느냐' 시조비詩調碑입니다.)

 

강원도 동해의 망상해수욕장을 지나다 보면, 길가에

"약천마을", "약천사"라는  안내 표지판이 나옵니다.

안내표지판을 따라 들어가다 보면 아주 평범한 시골마을이 나서고

그 마을 한 가운데 '약천사'라는 한옥이 나옵니다.

모르는 분들은 그곳에'약천사'라는 사찰이 있는가 보다 라고 생각할수도 있겠지만

'약천사(藥泉祠)'의 사(祠)자는 寺가 아니라 祠입니다. 절寺가 아니라 사당 祠입니다.

(제주도의 서귀포 남쪽 해안에 가면 바다를 향해 서있는 규모 큰 '약천사'라는 절이 있기는 합니다.)

 

조선 숙종시절 영의정까지 지내셨던 약천(藥泉) 남구만(南九萬)선생의 사당이 그곳에 있었습니다..

 

약천 남구만 선생,

의령 남씨 문중의 대표적 인물이면서 소론을  대표했던 인물이었지요.

TV드라마 '장희빈"등에서는 당파의 격류에 휩쓸린 왜곡된 인물로 묘사되었지만

그러나, 사실은 덕망과 문장 그리고 뛰어난 업적으로 선비들의 존경을 받았던 인물이었습니다.

조선 후기 대학자이자 정치가이며 실학파의 거두이었으며 고결한 인격까지 겸비했던

다산 정약용의 약천에 대한 평가를 보지요.

     "당화黨禍가 일어난 이래 묘당廟堂에 단정히 앉아서 중심을 저울질하던..(중략)..

      대부분 편파적으로 기울어져 사람들의 마음을 감복시킬수 없었다.  그러나 유독

      약천만은 그렇지 않았다. 간관諫官이 된 때부터 그 배격하고 구제하는 것에 있어서

      공정함을 잃지 않았다."

또 숙종수정실록도 약천을 논하면서

'이원익,최명길과 비교해도 그 우열을 가리기 어려울 정도'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는, 혼란의 시대  특히 파당간의 이해관계가 극심했던 시대를 살았지만

줄곧 굳은 절조를 바탕으로 두루 원만하게 일을 처리했던 인물이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분, 약천 남구만 선생의 영정이 모셔진 사당입니다.

시조 '동창이 밝았느냐'의 가락이 경내에 울리고 있었습니다.

 

 

 

 

약천 남구만 선생이 숙종임금때(1689년) 이곳에서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

주민들로부터 존경을 받아오다가 임금의 용서로 한양으로 떠난후

약천의 덕(德)을 기려 이곳 주민들이 '약천사'(기록에는 魯谷書院)를 건립하였답니다.

영조17년(1741년) 서원 철폐령으로 폐쇄되었다가 순조1년(1801년) 다시 중건이 되었다는데

철종6년(1885년) 강릉 신석(납돌)으로 이건되었다구요.

 

지금의 약천사는 동해시가 현위치에 '약천 남구만 얼 선양사업'의 일환으로

옛 약천사 자리에 새롭게 건립(1997-2006년)하였고

주변에 약천정, 약천각, 시조비등을 건립, '약천마을'을 조성했다고 하는군요.

 

약천사로 가는길 오른 쪽 언덕위에 약천정(藥泉亭)이 있습니다.

 

 

그리고, 약천 남구만의 시조 '동창이 밝았느냐'에는

'재너머 사래 긴밭을 언제 갈려 하느니'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지금은 '재너머'의 '재'(고갯길)는  없고  그 길에 반듯한 도로가 뚤려 있습니다.

악천마을 지나 조금 더 산쪽 방향으로 접어들면 길가에 '사래긴밭'이라는  표지석이 세워저 있습니다.

 

'사래', 요즘 말로 '이랑'이라는 말이지요?

'이랑이 긴 밭'이라는 말이 되겠습니다.

아무도 경작을 하지 않는지 잡풀들이 무성하기만 했습니다.

 

 

 

그런데..여기, 약천 남구만 선생과  시조'동창이 밝았느냐'

시조의 창작공간과 관련된 문제, 간단치가 않습니다.

 

동해시는 시조의 창작지가 남구만 선생의 유배지 '동해 심곡'이라면서

이곳에 약천사를 짓고 시조비와 사래긴밭 표지석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동해고속도로 '동해휴게소' 입구에도 또다른 시조비가 세워저 있구요.

그런데 남씨 종중의 생각은 또 다릅니다.

약천의 고향이자 말년에 정착한 용인시 모현면 갈담리 비파담(琵琶譚, 용인8경중 7경)이

시조의 창작지라는 주장입니다.

종중은 그래서 이 곳에 4각형의 돌에다 시조를 새긴 시가비(詩歌碑)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또다른 주장도 있습니다.

약천의 생가인 홍성군 구항면 내현리 속칭 '거북이마을' 약천초당(藥泉草堂)에서 지었다는 주장입니다.

이곳에도 고어체로 새긴 시조비가 있습니다.

 

어느 주장이 옳다고 말할수는  없겠습니다.

그것은  관련 학자들의 몫이겠지요.

다만, 그 시조를 어느 장소에서 지었느냐?하는 현상적 가치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분이 남기고 가신 '얼'과 '흔적'의 정신적 가치가

보다 더 소중하게 다루어 저야 되지 않겠느냐?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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