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골공원'입니다.
종로2가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사적 제354호입니다.
학창시절에는 '파고다(Pagoda)공원'에서 맞나자며 친구들과 자주 찾던 곳이었지요.
전차가 달리던 종로통에 위치해 있다보니 만남의 장소로 아주 좋은 곳이었드랬지요.
정말 오랫만에 찾았습니다.
옛날 그대로네요.
달라진 것이 하나 있다면 10층석탑이 두터운 유리보호대창살속에 갖쳐있다는 것입니다.
문화재 보호차원이겠지만...답답하네요.
'탑골공원'은 조선시대 원각사(圓覺寺)절터에 조성된 서울 최초의 근대공원입니다.
대한제국 재정담당 고문이었던 영국인 '브라운'의 제안으로 광무 원년(1897)에 조성되었다고 하지요.
이 공원안에 원각사지 10층석탑이 있어서, '탑골공원'으로 불리웁니다.
'파고다(Pagoda)공원'으로도 불리구요.
국보 '원각사지 10층석탑'과 보물 '대원각사비', 유형문화재 '팔각정'등
귀중한 문화재들이 있습니다.
또 이 공원은 3.1운동의 발상지로서 우리민족의 독립정신이 살아숨쉬는 유서깊은 곳이기도 합니다.
1919년 3월1일 이 '팔각정'에서 독립선언문이 낭독되었고
모여있던 학생들과 민중 4-5천명이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첬던 곳이지요.
그렇다 보니 '3.1운동 기념탑'을 비롯해서 '독립운동 부조판','손병희선생 동상'등 많은 기념물들이 있습니다.
먼저 '대원각사비(大圓覺寺碑)'입니다.
보물 제3호입니다.
'원각사(圓覺寺)'는,
조선 제7대 세조(世祖)의 명에의해 1465년 고려때부터 내려오던 '흥복사(興福寺)'의 옛터를 넓혀
건립한 사찰로 조선초기에는 조계종 본사로 번영하기도 했던 곳입니다.
다음은 '탑골공원 팔각정(八角亭)'입니다.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73호입니다.
광무 원년(1897)에 세워진 것으로 알려집니다.
원래는 대한제국 황실의 음악연주소 시설이었는데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가 낭독된 곳이어서 각별한 의미를 더합니다.
1919년 3월1일 아침부터 탑골공원에는 4-5천명의 학생들과 군중들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태극기를 꺼내 흔들며 일제히 대한독립만세를 외쳤습니다.
이어 수많은 민중이 대한문(大韓門)으로 향했는데,
전국으로 번진 3.1운동 만세시위가 이렇게 시작되었다고 하지요.
'원각사지 10층석탑(圓覺寺址十層石塔)'입니다.
조선초기 '원각사'안에 있던 높이 12m의 석탑입니다.
세조 13년(1467)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답니다.
수법이 세련되고 꾸밈 또한 화려하고 풍부해서 우수한 작품이라는 평가들입니다.
언젠가부터 이렇게 유리차단장치로 보호되고 있네요.
물론 문화재 보호차원의 대책이기는 하겠지만
시원스럽게 노출되어 있던 옛모습을 기억하고 있는 눈에는 너무도 답답해 보입니다.
생명이 있다면, 탑 자신도 아마 답답해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탑골공원은 이제 옛 원각사터에 조성된 서울 최초의 근대공원이라는 이미지보다는
독립선언문이 낭독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던 3.1독립운동의 요람이라는 역사적 의미가
훨씬더 기억되는듯 싶습니다.
'3.1운동 기념탑'입니다.
독립선언문 전문이 각인되어 있네요.
'3.1정신 찬양비"입니다.
'젊은이들이여보라한국의지성높은젊은이들이여정의와자유를수호하는이나라의주춧돌인청년학생들이여
이곳에걸음을멈추고가슴에손을얹어고요히주위를살펴보고둘러보라민족자결의고함치는독립만세소리
그대의귀에쟁쟁하리라....' 로 이어지는 비문이 가득합니다.
'단기4300년12월 박종화가 짓고 김충현이 쓰다'로 끝막음 되어있네요.
' 3.1정신 찬양비'를 시작으로
10개의 '3.1운동 기념부조'가 세워저 있습니다.
한개 한개 모두 설명문과 함께 순서대로 보겠습니다.
<1919년3월1일 오후2시 탑골공원에서 수천명 학생들이 정재용의 독립선언서 낭독이 끝난후
대한독립만세를 높이 외치며 거리로 달려나가자 서울은 순식간에 감격과 흥분의 도가니가 되었고
그대로 파도와 같이 전국으로 퍼저 나갔다>
<1919년3월2일 함경도 함흥고을 민중들은 역사깊은 만세교 위를 달리며 독립만세를 불렀다.
왜경의 총칼이 번뜩일수록 만세소리는 더 높았고 그주에도 조영신이란 소년의 입을 찠었을때는 더욱더 거센
만세소리가 천지를 흔들었다>
<1919년3월1일 정오 평양 기독교신자들은 종소리가 울리자 장댓재예배당으로 모여 들었다.
고종황제 추도식을 마치고 이어 거리로 달려나가 천도교교인들과 합세하여 모두들 태극기를 들고
왜경의 총탄을 무릅쓰고 만세시의를 했다>
<1919년3월10일 오후에 황해도 해주에서는 문월선등 기생들이 선봉이 되어 만세시위를 하자
잔악한 기마경찰들은 우리 민중을 마구 짓밟고 여자의 머리채를 말꼬리에 잡아매어 끌었지만은
그들은 왜경앞에 조금도 굴하지 아니했다>
<1919년3월10일 강원도 철원고을 민중들은 학생들을 선두로 모두들 손에손에 태극기를 들고
물밀듯 거리로 몰려나와 독립만세를 높이 외쳤다. 악독한 왜경들은 총을 마구 쏘며 칼을 휘둘렀으나
죽음을 무릅쓰고 앞으로 행진할 뿐이었다>
<1919년4월15일 오후 일본군 1개소대가 수원 제암리에 와서 예수교인들과 천도교인들을 교회당에 몰아 넣고 총으로 난사하며 불을 질렀다. 불을 피해 나오는 부인은 칼로서 잔인하게 죽이고 창문으로 내어보내는
아기들마저 죽였다>
<1919년3월1일 천안고을 병천시장에 수천명의 군중이 독립선언식과 함께 만세를 불렀다. 주모자 유중천등 20여명은 현장에서 참살되고 유관순 처녀는 일경에 체포되어 감옥으로 넘어가 혹독한 고문에 항쟁하다
마침내 옥사했다>
<1919년3월23일 경상남도 진주에서는 기생 수백명이 만세를 부르며 남강가를 행진했다.
일본경찰과 헌병들이 총검을 들고 찌르려 했으나 그들은 아우성치며
우리는 논개의 후신이라 하고 애국가를 부르며 앞으로 용감히 달려갔다>
<1919년4월3일 남워에서 일어난 일이 있다. 수천명 군민들이 질서정연하게 만세를 부르다가
방모씨등 20여명이 일본경찰의 칼아래 쓸어지자 그의 아내와 어머니마저 달려와 거기서 자결하며
독립을 이루라는 말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1919년3월23일 제주에서도 남녀군중과 학생들이 함께 일어나 만세를 불렀다.
한라산 정기를 타고난 그들은 맨손으로 달려나가 일본경찰의 무서운 총칼과 싸워 피를 흘리면서도
행진을 계속하며 한사람도 굽힘이 없었다>
지금까지 10개의 '3.1운동 기념부조'를 각각 보았습니다.
이어서 3.1운동 기념부조에 연해서 세워저 있는 '탑골공원 사적비'를 봅니다.
단기 4천3백년 12월 이은상 글, 김충현 글씨로 3.1 운동과 탑골공원의 역사적 연관성 그리고 그 의미가
조각되어 있습니다.
의암 손병희(義菴 孫秉熙)선생의 동상입니다.
천도교 제3대 대도주(大道主)이자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으로 참여하셨었지요.
'만해용운당대선사비(萬海龍雲堂大禪師碑)'입니다.
시인승려이시자 독립운동가이신 만해(萬海) 한용운 (韓龍雲)선생의 업적을 기리는 비석(碑石)입니다.
공원 이곳저곳에 백일홍(배롱나무꽃)과 옥잠화, 쑥부쟁이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네요.
공원의 운치를 더욱 밝혀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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