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성지

제주 관덕정

by 鄭山 2009. 9. 22.

 

 

 

관덕정(觀德亭),

조선시대 제주목관아의 군사훈련 장소였지요.

그러나 천주교의 입장에서 보면,

1901년 제주교난(濟州敎案, 신축년에 일어났다해서 辰丑敎案이라고도 하고 '신축년 제주도 민란'이라고도

부릅니다.)때  무수하게 많은 신자들이 학살된 순교사적지입니다.

 

당시 제주에는 봉세관(捧稅官)이라는 제도에 대한 도민들의 원성이 높았답니다.

봉세관이란 민란이 일어나기 전해인 1900년에 신설된 세제로서

민초들로 부터 세금을 더욱 악랄하게 거두어 들이기 위한 제도였다구요.

서울에서 파견된 봉세관은 해당 지방의 백성들로 부터 온갖 잡세들을 거두어 들이고 있었답니다.

제주의 토착관료들과 당시 제주에 진출해서 어업 이권을 쥐고 있던 일본인 밀어업자들은

이 문제를 둘러싸고 봉세관에 대한 주민들의 불만을 교모하게 이용하려 했다는 군요.

이들은 온갖 방법을 써서 당시 민중들의 불만을 천주교인들에 대한 반감으로 돌림으로써

무수한 인명을 희생시킨 제주교난의 원흉이었답니다.

이런 상황을 이용해서 마침내 1901년 5월 대정군수 채구석과 강우백, 이재수 그리고 유림의 좌수 오대현 등은 도민들을 규합하고 일본상인들과 결탁해 그들로 부터 입수한 무기로 무장한 뒤

봉세관과 교회가 있는 제주읍성을 포위한채 천주교인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 죽였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라크루 신부는 교우들을 이끌고 제주읍을 방어하는 한편

중국 상해에 있는 프랑스 함대에 구원요청을 보냈으나

함대가 도착하기전 5월 29일 제주읍성은 함락되고

많은 교우들이 이 관덕정에서 피살 되었다는 군요.

어느 보고서는 천주교 신자 500명을 포함해 700명이 희생되었다고 하고

어느 보고서는 천주교인 300명이 피살되었다고도 합니다.

무심하게 지나쳤던이  관덕정 앞길이 사실을 알고 난후는 끔찍한 길로 바뀌어 보입니다.

 

 

다시 복원된 대정관아 조감도입니다.

좌측하단에 관덕정이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