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들도 쉬어 넘는다는 새재(鳥嶺),
서울에서 충주와 수안보를 지나 30여리를 더 가면 연풍(延豊)에 이릅니다.
지금은 터널이 뚤려 어렵게 새재를 오를 일은 없지만 옛길은 새들도 쉬어 넘는다는
심하게 굽이 도는 고갯길이었습니다.
성지까지는 좁은 길을 따라 한참을 달려 들어가야 합니다.
연풍성지는 보령 갈매못에서 순교하셨다는 성인 황석두 루가의 고향이며
최양업신부의 발자취가 서려있는 유서깊은 성지입니다.
초대교회 당시부터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어 있었던 뿌리깊은 교우촌이기도 했다고 하구요.
연풍마을과 문경새재의 구석구석마다 선조들의 자취와 피의 역사가 어려있는 순교성지랍니다.
'연풍성지를 소개하는 안내 현판'에는 연풍성지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한국천주교회가 창립된후 17년이 지나 일어난 신무년 대박해(1801)로 인하여
유일한 목자이던 주뭄모 신부를 비롯하여 주요 창립선조들을 잃게 된 교우들은
신앙을 자유로히 지키기 위해 사람이 살지않은 심산유곡인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을 타고
경상도, 강원도 지방으로 삶의 터를 옮겨 신앙생활을 지켜 나갔는데,
그중 소백산맥 기슭에 있는 연풍은 교우들이 숨어들수있는 천혜의 은거지가 되었다.
이렇게 박해를 피해 찾아둔 교우들에게 험한 산세로 고초를 겪게한 한서린 기억과
관헌들의 눈을 피해 숨어있는 교우들을 찾아다니며 신앙을 전했던 최양업 신부와
깔레 강 신부의 발자취가 서려있는 문경새재가 바로 이웃에 있다......."
연풍성지가 기억하는 첫번째 인물은 최양업 신부입니다.
김대건 신부와 함께 마카오에 유학해서 13년간의 각오끝에 사제서품을 받고
1849년부터 12년간 새재를 넘나들며 이 지역에 신앙의 꽃을 피웠다고 하지요.
새재 아랫마을 문경읍 진안리의 어느 주막에서 갑자기 병을 얻어 세상을 뜨셨다는데
생전에 쉴새없이 넘나들던 새재의 연봉 배른 신학당 뒷산에 옮겨저 묻혔다 하지요.
그리고 연풍성지는 황석두 루가 (1811-1866) 성인의 발자취가 확연한 곳이기도 합니다.
부유한 양반집 선비였던 황루까는 출세의 길을 버리고 일생을 천주교리 연구 등
교회사업에 몸바치셨답니다.
안토니오 주교 비서로 성서번역과 저술, 판각사업 등 교회사업을 하시다가
안토니오 주교 등 다섯분이 함께 1866년3월11일 참수를 당하셨답니다.
'다섯 성인상(聖人像)과 반석(盤石)'입니다.
황석두 루까 성인과 함께 보령 갈매못에서 함께 교수형에 처해 지셨던
다섯분 성인의 상(像)입니다.
안토니오 주교, 베드로 신부, 루가 신부, 황석두 루가 회장, 장주기 요셉 회장 다섯분입니다.
저 반석위에서 주교가 마지막 강론을 하셨고, 감사 성가를 부르며 순교지로 끌려들 가셨다네요.
'황석두 루까 성인상(像)과 무덤'입니다.
1866년 3월 11일 갈매못에서 순교하신 얼마후 유해는 양아들 황요한에 의해서
연풍 장연면 방곡리 고향땅에 묻혔다가 1982년 8월 25일 이곳으로 천묘되셨답니다.
1984년 5월 6일 성인 반열에 오르셨다구요.
국내 최대의 십자가가 세워진 이곳 부근은 옛날 사형장 이었답니다.
죄인들이나 천주교를 믿다가 잡혀온 교우들이 형방 건물에서 고문을 당한후 배교하지 않으면 옥에서 끌어내 이곳에서 처형하기도 했다는 군요.
그리고, 당시 사용했다는 '형구돌' 입니다.
병인박해(1866년)때 순교자들을 소리없이 주이던 '형구돌'이랍니다.
밧줄로 묶인 목인 목이 앞구멍에 놓이면 반대편 구멍에서 줄을 잡아 당겨 죽이던 잔혹한 형구였답니다.
이곳에서 3개가 발견되었는데, 1 개는 절두산 성지에서 전시되고 있다네요.
성지 경내에는 노기남 대주교 바올로 상(像)이 세워저 있네요.
한국인 초대 주교님이셨지요.
살아생전에 마지막 공적 행사로 이곳에 성(聖) 루가 황석두의 천묘식을 주례하고 축성을 하셨다는군요.
'수안보천주교연풍공소'라는 간판이 걸려 있습니다.
안내판에는 '향청' 이라고 표시되어 있습니다.
연풍성지가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1963년 연풍공소로 향청건물을 매입하면서 부터라고 합니다.
3백년이나 묵은 이 건물을 매입할 당시만 해도 이곳이 순교터라는 사실은 몰랐었다네요.
매입후 논과 집터 등을 정리하다가 형구돌이 3개나 발견 되었다는는군요.
경당과 사무실 건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