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옛날 교우들은 박해를 피해서 산으로 계곡으로 숨어 들어 옹기를 구우며 살았답니다.
이곳 배론성지 또한 그런 곳중의 한곳입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이 배론성지가 더욱 뜻깊은 것은,
그 옛날 이곳 옹기토굴에서 1만3천11자 '황사영백서'가 쓰여 �던 곳이고
이땅 최초의 초가집 신학당이 세워 �었으며
김대건신부에 이은 이 땅의 두번째 신부, 최양업 신부가 묻혀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심산유곡, 계곡이 깊어 배밑바닥 같다해서 '배론'이라 불렀답니다.
충북제천 봉양면 구학리,
백운산과 구학산 연봉 사이로 10여리 들어간 곳에 '배론성지'가 있습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신앙을 지켜가던 옹기마을에 최초로 역사적인 사건이 터진 것은
'황사영백서'사건이었습니다.
황사영은 나이 16세에 장원급제를 해서 정조가 친히 등용을 약조할 정도로 전도가 밝은 청년이었답니다. 정약용으로부터 천주학을 전해듣고 주문모신부에게서 영세를 받는 답니다.
벼슬길도 마다하고 1801년 신유박해때 배론으로 숨어 들었다네요.
그해 8월 주문모신부의 처형소식을 전해 듣고 울분과 낙심속에
북경 주베아 주교 에게 탄원서를 적지만 백서를 가져가던 황실이 붙잡히고
황사영도 능지처참의 형에 처해 �다지요.
명주자락에 1만3천11자 탄원서를 써내려간곳이 바로 아래의 토굴입니다.
그리고 '황사영 순교헌양탑'입니다.
그리고 토굴 바로 옆에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신학교가 세워 집니다.
백서사건후 55년뒤인 1856년이었답니다'
10명의 학생과 두분의 프랑스 신부교수, 10년후 병인박해때 모두 처형되고
학교는 그만 폐쇄되고 만다구요.
초가집신학교와 두분의 프랑스 교수 신부상(위로부터 푸리티에신부, 프티니콜라신부)입니다.
최양업신부 동상입니다.
그리고 최양업신부 기념 성당입니다.
최양업신부는 김대건신부 보다 4년 늦게 사제서품을 받고 12년동안 사목활동을 펼치다가
피로와 무리한 활동으로 쓰러저 이곳 배론신학당 뒷산에 묻힙니다.
어떠분들은 김대건신부를 '피의 순교자'로 부르고
최양업신부를 '땀의 순교자'라 부릅니다.
김대건신부는 처형으로 순교하셨다 해서 '성인' 반열에 오르셨지만
최양업신부는 처형당해 순교하신게 아니라서 '성인'이 못되신 답니다.
'성인의 기준'이 처형이란다면 그것은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경내에는 두분의 성모상이 모셔저 있읍니다.
그리고 성녀 소화테레사 수녀상도 모셔저 있었읍니다.
그리고 무명 순교자의 무덤도 있읍니다.
성지 경내에 붉게 물든 낙엽이 한창이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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