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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성거산성지

by 鄭山 2010. 7. 5.

 

 

 

 

 "이곳은 신유박해(1801년)부터 병인박해1866)끝날때까지 박해를 피해 신자들이 비밀리에 모여살던 교우촌이 형성되었던 곳이며

프랑스 선교사 신부들이 은신처로 사용하며 사목활동을 하였던 곳이기도 합니다.

또한 성거산 교우촌 출신 순교자 23명중 병인박해때 순교한 소학골 출신 5분의 순교자들과

많은 무명 순교자들의 묘소가 있는 성지(聖地)입니다."

 

 

경기도와 충청북도 경계선에 자리잡은 천안의 성거산 성지는 해발 579m로 차령산맥 줄기의 높은 고지대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고려태조 왕건이 수행원들과 함께 성환지역에 머물면서 잠시 쉬는 동안

이 산에 오색구름이 맴돌며 신령한 기운이 감도는 모습을 보고는

'거룩할 성(聖)'자에 '살 거(居)'자를 써서 '성거산(聖居山)'이라고 이름 짓고 제사를 올렸다지요.

그리고 조선조 태조 이성계와 세종대왕도 온양온천에 목욕하러 올때마다 이 산에 들러 제사를 올렸답니다.

성거산 정상 바로 아래에 성지가 위치하고 있습니다.

 

봄과 가을에는 들꽃과 단풍으로,  여름과 겨울에는 울창한 숲과 환상적인 눈(雪) 경치로 장관을 이룬다지만

순례자의 마음은 처연하기만 했습니다.

신앙이 얼마나 깊었으면 이리도 깊고 깊은 심신산골에까지 올라와서 숨어서들 사셨을까?

누가 이 깊은 산골의 교우촌 위치를 고발했고 포졸들은 또 어떻게 이토록 깊은 산골까지 덥처 올라 왔을까?

수많은 순교자들의 시신은 또 누가 이토록 깊고 높은 산골자기까저 옮겨와서  묘를 써놓았을까?

 

 

 

성거산 등산길에 오른 분들이 좁은 아스팔트길을 따라 오릅니다.

등산객도 있겠지만 순례길에 오른 신자분도 섞여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꼬불꼬불한 산길을 자동차로 오르면서 조금은 미안했지만

성지구역  곳곳을 오르고 내려야 할터이니 그것도 힘들겠다 싶어 그대로 오름니다.

또 정상에 주차장이 있다니 차로 오르는 것이 미안할 일은 아닐듯도 싶습니다. 

아마도 이 도로는 1959년 미 공군기지가 정상에 주둔하면서 닦아 놓았을 터이고

훗날 천안시에서 포장을 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정상으로 오르는 가파른 길을 한참 오릅니다.

제1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제1 줄무덤까지 내려갑니다.

 

 

 

제1 줄무덤 입니다.

38기의 묘봉이 있습니다.

커다란 십자가와 예수성심상이 줄무덤을 지키고 있습니다.

병인년, 교우촌 소학골 출신 순교자 배문호(베드로 24세), 고의진(요셉 24-25세), 최천여(베드로 55세), 최종여(라자로 42세),

그리고 배씨 며느리 5분의 시신도 이곳에 모셔저 있답니다.

이 다섯분 순교자들은 1866년 10월(음력)에 비밀공동체였던 소학골 교우촌이 발각되면서 포졸들이 덥쳐와  체포되었고

목천면으로 압송되어 문초를 받다가 다시 공주감영으로 압송되어 많은 고문을 받으며 끝까지 신앙을 증거한뒤

11월8일(음력) 함께 순교를 하셨답니다.

청주  절골에 사시던 강지윤씨가 이곳 소학골에 이 분들을 묻었다구요.

그 외에도 이름 모르는 많은 순교자들이 함께 묻혀 있습니다.

 

제2 줄무덤에는 36기의 묘봉이 더 있답니다.

제1, 제2 줄무덤 합해서 모두 74기의 묘봉이 있다는 얘기인데...

그런데 사실은, 시신(屍身)들이 겹쳐저 묻혀 있기도 했었고

1959년 미 공군부대가 정상에 주둔하면서 도로를 개설할 당시 도로상에 있었던 묘봉수만해도 107기였다고 하니

묘봉수는 훨씬 더 많아야 될듯 싶습니다.

 

 

 

 

이곳 제1 줄무덤에서 제2 줄무덤까지는 530m 거리이고 가는 동안 십자가의 길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안내도면상의 제2 주차장이 얼마나 떨어저 있는지 몰라서 제1주차장으로 돌아와 제2주차장으로 차를 옮깁니다.

그런데 제1주차장과 제2주차장, 아주 가까은 거리입니다.

제2주차장은 제2 줄무덤으로 가는 또다른  성지입구 이기도 합니다.

 

 

 

성모상이 모셔저 있는 성모광장이 나옵니다.

야외미사를 위한 의자들과 제대가 있습니다.

순교자 헌양탑이 있습니다.

 

 

 

 

 

순교자헌양탑을 돌아서 제2 줄무덤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36기의 묘봉이 있습니다.

 

 

제1 줄무덤도 그렇지만 제2 줄무덤도 한없이 조용하기만 합니다.

 오랜동안 긴 세월을 찿는이도 없었을 테고  벌과 나비 그리고 짐승들만이 함께 했었을 것으로 생각하니

죄스러운 마음이 울컥 가슴을 칩니다.

 

 

소학골 교우촌으로 가는 길, 순례자의 길이 이곳에서 부터 시작됩니다.

제2줄무덤에서 소학골에 이르는 2.1 Km 순례자의 길에는 

55개의 호롱등에 103위 성인과 이곳 순례자들의 이름이 새겨저 있어 묵상하며 걸을수 있습니다. 

또 교우(敎友)들이 세워놓았을듯  싶은 예쁜 시(詩)현수막들이 군데군데 세워저 있습니다.

 

 

 

 

 

교우촌 중에서 가장 오래 되었다는 소학골 교우촌터 입니다.

 

1886년 병인박해(1886년)당시  프랑스 외방선교회 소속 니콜라 칼레 신부, 페롱신부, 위델주교, 두세신부, 베르모델신부가 숨어 지내며

사목활동을 하던 곳이고

공주감영에서 참수형을 당하신 5분 순교자들이 사시던 곳이랍니다.

한참동안을 이곳에서 머물렀습니다.

그 옛날, 이 높고 험한 산속에서 어떻게들 지내셨을까?

포졸들이 고함치며 밀어 닥첬을때는 또 얼마나 무서우셨을까?

 

이곳에 은거해서 사목활동을 하셨다는 칼레신부가 파리의 신학교 교장신부에게 보냈다는 1867년2월13일자 서한입니다.

"소학골은 독수리 둥지처럼 높은 곳에 자리잡고 있으며, 호랑이가 득실거리고, 숲이 우거진 산들로 둘러싸여 있기때문에

찾아가기 어려운 곳입니다. 그러나 조용히 숨어 살기에는 아주 좋은 피신처입니다.

마치 들짐승처럼 사방에서 쫒기는 선교사가 평화로운 이곳에서만은 맑은 공기를 마시면서  어느 누구에게 들킬 염려가 없이

초가집에서 나와  눈앞에 펼처진 자연의 아름다움을 만끽할수도 있고, 별들이 반짝이는 하늘을 감상할수도 있습니다."

 

눈앞에 펼처지는 자연의 아름다움은 그대로 인데 호랑이도 없고 초가집도 없습니다.

그저 침묵만이 있습니다.

 

 

 

십자가의 길입니다. 

제1 줄무덤에서 성모동산에 이르는  530m 소로를 따라 14처가 모셔저 있습니다.

비올듯 흐린 날 아침나절의 울창한 숲속이라  카메라 후랫쉬를 열었습니다.

 

 

 

 

 

 

 

 

 

 

 

 

 

 

 

깊은 산골이라 풀벌레들의 소리, 새들의 소리가 손에 잡힐듯 가깝습니다.

나무가 울창하고 따라서 상쾌한 공기가 싱그럽기까지 합니다.

다시 오고 싶은 성지입니다.

 

성거산 성지가 성지로 개발된지는 불과 15년 남짓하답니다.

1995년 천안 성황동(현 신부동)본당 주임신부로 부임해온 정지풍 아킬레오 신부가

순교자들의 후손들에게서 치명자산이 있다는 얘기를 들은게 계기가 되었다구요.

1959년 군부대가 산 정상에 주둔하면서 도로확장공사로 이장되어온 순교자들의 줄무덤이 하나하나 정비됐고

1998년 7월22일 대전교구성지로 승인이 되었다구요.

성거산성지 사제관은 성지로 오르는 길목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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