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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며가며

사육신(死六臣)공원

by 鄭山 2008. 12. 16.

 

 

 

노량진 언덕위에 한강을 굽어보는 '사육신공원(死六臣公園)'이 있습니다.

서울에 살면서 그렇게도 많이 승용차로, 버스로, 전철로 그 앞을 지나면서도 이제사 시간을 내어 찾아봅니다.

 

이곳은 조선 제6대 단종(端宗)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목숨을 바친 사육신(死六臣)을 모신 곳이지요.

사육신의 충성심과 의기를 추모하고자 숙종7년(1681) 이 산 기슭에 '민절서원(民절書院)을 세웠고

정조 6년(1681)에는 신도비(神道碑)가 세워저 전해왔습니다.

6.25 안국전쟁이 끝난뒤 2년후인 1955년 5월, 당시 대통령의 지시로 이곳에 육각(六角)의 사육신비(死六臣碑)가 세워집니다.

그리고 1978년 서울시에 의해 묘역이 성역화 됩니다.

 의절사(義節祠), 불이문(不二門), 홍살문, 비각(碑閣)이 이때 세워지지요.

 

 

노량진을 지나는 시내버스를 타면 차내 안내방송이 나옵니다.

"이번 정류장은'사육신공원'입니다."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8호입니다.

 

 공원의 정문입니다.

 

 '홍살문'입니다.

홍살문을 지나 60m정도 오르면 불이문(不二門)에 이름니다.

두임금을 모시지 않겠다는 뜻이겠지요?

 

 '불이문(不二門)'입니다.

'의절사(義節祠)'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출입구가 세칸입니다.

가운데 문은 사육신의 신려이 드나드는 문이고 일반 참배객은 좌우의 두문응 사용해야 한답니다.

오른쪽 문은 들어가는 문이고 왼쪽문은 나오는 문이랍니다.

 

'불이문'을 지나 40m정도 거리의 뜰을 지나고 계단을 오르면 '의절사'입니다.

 

 '의절사(義節祠)'입니다.

1978년 서울시가 묘역 정화공사를 하면서 세운 사당입니다.

사육신(死六臣)의 위패를 모신 곳이지요.

사당문앞에 향로가 향을 피우고 있습니다.

그리고 위패들이 모셔저 있습니다.

 

그런데 위패가 여섯이 아니고 일곱입니다.

일곱분의 위패가 모셔저 있습니다.

왼쪽 부터 하위지(河緯地) 선생, 성삼문(成三問) 선생, 유성원(柳誠源) 선생, 이개(李塏) 선생,

유응부(兪應孚) 장군, 박팽년 (朴彭年)선생, 김문기(金文起) 선생 순서로 위패가 모셔저 있습니다.

(의절사 뒷편 언덕위의 묘소 위치순서대로 모셔저 있습니다.)

 

그리고 의절사(義節祠)뒤 언덕에 모셔진 사육신(死六臣)의 묘(墓)도 여섯기가 아니고 일곱기입니다.

그러니 '사육신(死六臣)'이 아니고 '사칠신(死七臣)'이라는 얘기가 됩니다.

어찌된 일일까요?

이곳 사육신공원(死六臣公園)에 모셔진 일곱분은

기존의 사육신(死六臣) 여섯분외에 김문기(金文起)선생이 추가되어 있습니다.

 

지나간 역사를 되돌아 보지요.

집현전 출신의 유학자들이 참여한 단종복위계획은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가 중심이되어 모의가 됩니다.

집현전을 모의장소로 해서 여러차례 의논을 한 결과, 세조2년(1456) 6월 창덕궁에서의 명나라사신 환영연회 자리에서  성승(성삼문의 아버지)등 세명의 호위무장이 세조를 칼로 베고 단종을 복위시키로 하지요.

한명회의 주장으로 연회절차가 바뀝니다.

거사 또한 연기됩니다.

이때 계획에 참여했던 김질(金瓆)이 장인 정창손에게 알리고 정창손은 세조에게 고합니다.

세조는 이들을 잡아들이고 거사는 실패합니다.

주모자인 성삼문,박팽년, 하위지,이개, 유성원, 유응부는 처형당합니다.

이들을 사육신으로 명명한 것은 남효온(南孝溫)이 지은 '추강집(秋江集)'의 육신전(六臣傳)의 기록입니다.

남효온의 문집 '추강집' '육신전'에 위 여섯분의 기록이  수록되면서

수양대군의 불법에 맞서 저항한 이들의 명성은 재야의 사림(士林)들을 중심으로 널리 회자됩니다.

 

남효온은 김시습, 원호등과 함께 '몸은 비록 살아있어도 정신은 사육신을 계승한다'는 뜻에서

생육신(生六臣)으로 불리운 인물가운데 한분이지요.

당시체제에 저항하다가 처형된 사람들의 전기를 기록으로 남겼다는 것은  

매우 용기있는 행동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한편, 나라에 의한 사육신 추숭(追崇)작업은 조선후기 숙종때부터 시작됩니다.

당시 이곳 노량진에 성삼문, 박팽년, 유응부 등의 묘가 있었는데

이곳을 둘러본 숙종이 사육신묘에 제사지낼것을 명하였다고 하지요.

그리고 숙종 7년(1681), 이 산기슭에 서원을 세웠답니다. 

이어서 정조 6년(1782)에는 이곳에 육신의 묘비(墓碑)인 '신도비(神道碑)'가 건립된답니다.

남효온이 '육신전'을 저술하고 숙종, 정조시대에 사육신에 대한 본격적인 추숭작업을 실시하면서

사육신은 위 여섯분으로  고정되어 내려왔습니다.

우리들이 학교 다닐때도 그렇게 배웠구요.

 

그런데,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김문기(金文起)선생의 후손들이

단종복위운동에 참여했던 김문기(金文起)선생의 행적이 기록된 자료들을 제시하면서

김문기 선생도 사육신과 동등한 추숭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탄원에 나섭니다.

 

문제는 '조선왕조실록'과 '추강집','육신전'의 기록에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이개, 성삼문, 하위지, 유성원, 박중림, 권자신, 김문기, 성승, 유응부, 박쟁, 송석동,

최득지, 최치지,윤영손, 박기년, 박대년 등 17인이 반역을 꾀했으며

주모자는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김문기순으로 6인만이 기록되어 있답니다.

김문기는 '도진무(都鎭撫=都摠管)'로서 박팽년과 모의할때 군 동원의 책임을 맡았다고 수록되어 있답니다.

결과적으로 1978년, 서울시가 사육신공원을 조성하면서

사육신묘에 김문기 선생의 가묘(假墓)를 추가로 설치하는 것으로 타협이 된 모양입니다.

유응부(兪應孚)선생의 묘는 그대로 그 위치에 두기로 했구요.

사육신 구성은 종래대로 변경되지 않는 것으로 보입니다.

 

왼쪽의 세묘입니다.

왼쪽부터 하위지(河緯地), 성삼문(成三問), 유성원(柳誠源)선생의 묘입니다.

 

원래 이곳에는 다섯분의 시신이 묻혀 있었답나다.

당시 무려 40여명이 사지를 찟기는 참혹한 형으로 죽임을 당했는데

어느 스님이 그 가운데 성승, 박팽년, 유응부, 성삼문, 이개  다섯분의 시신을 추스려 이곳에 모셨다고 합니다.

그 스님은 생육신가운데 한분, 매월당 김시습이라고 전해집니다.

그후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성승 선생(武將, 성삼문의 아버지)의 묘가 실전되어 네분의 묘소만이 있었으나

묘의 수효와는 상관없이 '사육신묘'로 불리워저 왔답니다.

1978년 성역화 과정에서 하위지, 유성원, 김문기 선생의 가묘(假墓)가 추가로 봉안이 되었다구요.

그러니까, 성삼문 선생의 묘를 중심으로한 좌우의 하위지, 유성원 선생의 묘는 가묘가 되겠습니다. 

 

한편,관람객 여러명을 인솔하고 온 역사해설가에 따르면

이 언덕(山)이 예전에는 '성가산(成家山?)'이라 불리웠답니다.

아마도 성승, 성삼문 일가 소유의 산이었던듯 싶습니다. 

 

오른쪽의 네묘입니다.

왼쪽부터 이개(李塏),유응부(兪應孚),박팽년(朴彭年),김문기(金文起)선생의 묘입니다.

그러니까, 사진속 두 무덤 사이 뒤쪽 조그맣게 봉분만 보이는 것이 김문기 선생의 가묘입니다.

 

성삼문(成三問)선생의 묘비(墓碑)입니다.

봉분앞에 세워진 묘비(墓碑)가 초라합니다.

당대최고의 유신(儒臣)들이었고 무장(武將)들이었는데 이름을 남기지 못하고

성씨(姓氏)만 새겨저 있습니다.

"ㅇ氏之墓"

역적으로 처형되었으니 떳덧이 이름을 새겨넣을수 없었던 모양입니다.

슬픈 역사의 단면입니다.

 

 '의절사' 광장 왼쪽에 자리한 '신도비각(神道碑閣)'입니다.

'신도비(神道碑)'는 정조6년(1681)에 세워젔다고했지요.

물론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유응부 여섯분을 기리는 '신도비'입니다.

 

'의절사' 앞 오른쪽에 위치한 육각(六角)의 '사육신비(死六臣碑)'입니다.

각 면에 사육신 여섯분의 이름을 한분씩 새기고 그 분을 기리는 글들이 각인되어 있습니다.

대한민국 초대대통령 이승만(李承晩)박사의 지시에 따라서

글은 김광섭님이 짓고 김충현님이 썼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1955년5월에 세워진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각인되어있는 여섯분은 물론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유응부 선생입니다.

 

사육신(死六臣)들이 남기고 간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의(節義)와 기개(氣槪)를 읊은 시(詩)들을

들추어 봅니다.

 

성삼문(成三問) 선생이 죽기직전 하인이 바치는 술 한잔을 마시며 읊었다는 시(詩)가 그중 유명하지요?

"이 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꼬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랑장송이 되어있어

백설이 만건곤할제 독야청청하리라."

 

성삼문 선생이 처형장인 노량진 한강 백사장으로 끌려가면서 읊으셨다는 시(詩)도 처연 합니다.

"처형장의 북소리는 목숨을 재촉하고

고개를 돌려보니 서산에 해지려하네

황천길에는 여인숙 하나 없다는데

오늘밤에는 뉘집에서 묵고 가야하나"

 

박팽년(朴彭年)선생이 단종폐위를 도모한 신하들을 풍자했던 시(詩)도 있지요?

"까마귀 눈비맞아 희는듯 검노매라

야광명월이 밤인들 어두우랴

님향한 일편단심이야 변할줄이 있으랴"

 

이개(李塏)선생의 시(詩)도 한수 읽지요.

"방안에 켜논 촛불 누구와 이별컨대

겉으로는 눈물지고 속타는줄 모르는가

저 촛불 나와같아 속타는줄 모르누나"

 

유성원(柳誠源)선생의 시(詩)도 있습니다.

"초당에 일이 없어 거문고를 베고 누워

태평성대를 꿈꾸어 보려터니

문전에 수성어적이 잠든 나를 깨워라"

 

유응부(兪應孚)장군의 시(詩)도 한수 읊어야 되겠지요?

"간밤에 불던 바람에 눈서리 치단말가

낙랑장송이 다 기울어 가노매라

하물며 못다핀 꽃이야 일러 무삼하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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