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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며가며

매헌 윤봉길 기념관

by 鄭山 2011. 1. 21.

 

 

 

따뜻한 봄날이나 여름 날 찾았으면 꽃피고 녹음이 짙은 풍성한 날이었을 터인데 추운 겨울 날 찾다보니 쓸쓸하기만 했습니다.

서울 양재동 시민의 숲 끝자락에 자리한 '매헌(梅軒) 윤봉길(尹奉吉)의사 기념관'입니다.

집 가까운 학생이 지각한다고 가까이 살다보니 차일 피일 미루다 이제야 찾습니다.

 

윤의사 상해의거 55주년을 기념해서 1988년 12월1일 각계의 성금으로 이곳에 기념관이 세워젔지요.

1988년이라면 서울 올림픽이 치루어지던 해 였지요.

대지 1,996평에 건평 743평 지하1층 지상 3층 건물입니다.

기념관 1,2층에는 유품과 생애사진, 독립운동 관련 사진이 전시되어 있으며

3층에는 강당시설이 갖추어저 있습니다.

 

 

윤봉길 의사는 1908년 6월21일 충청남도 덕산면 시량리에서 파평윤씨(坡平尹氏) 황(璜)공과

경주김씨(慶州金氏) 원상(元祥)여사의 장남으로 태어 나셨답니다.

덕산보통학교를 자퇴한뒤 오치서숙에서 수학하고, 19세때인 1926년부터 고향에 야학을 세워 농촌계몽운동을 시작했으며,

20세때에는 각고독서회를 조직하고 농민독본을 편찬했으며,

월진회(月進會)와 수암체육회를 조직하여 농촌운동을 통한 민족운동을 정열적으로 전개하셨다구요.

윤의사는 국내에서 독립운동이 어려워지자 23세때인 1930년 3월6일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이라는 글을 써놓고

중국으로 망명하여, 청도를 거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는 상해에 도착을 합니다.

일본군이 1932년1월28일 상해를 침공하여 점령한 후, 4월29일 천장절겸 상해 점령 전승경축 기념식을 홍구공원에서 거행하게 되어

상해 점령 일본군 군정수뇌들이 여기에 모이게 되자,

윤의사는 백범 김구선생이 지휘하는 한인애국단에 가입하여 이에 특공작전을 감행할것을 자원하게 됨니다.

윤의사는 단신으로 1932년 4월29일 상해 홍구공원에서 상해 점령 일본군 총사령관 시라카와 등 군정 수뇌들 7명에게

폭탄을 투척하여 일본의 전의를 상실케 하는데 성공합니다.

윤의사는 현장에서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어 5월25일 현지의 군법재판에서 단심으로 사형을 선고받고,

11월에 일본으로 이송되어 그 해 12월19일 25세를 일기로 순국을 하십니다.

 

기념관에 들어서면 윤의사의 흉상과 폭탄을 투척하는 모습의 동상이 방문객들을 맞이 합니다.

 

 

 

 

전시물 가운데 윤의사가 한인애국단 앞에 맹서를 하고 거사직전 김구선생과 기념사진을 찍어 놓은 사진들을 모았습니다.

대한민국 14년(1932년)4월 26일 한국애국단원 자격으로 태극기 앛에서 의거결행을 선서했던 선서문,

"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적의 장교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

 

 

1932년 4월29일, 상해 홍구공원에서  일본군 총사령관 등 군정수뇌들에게 윤의사가 폭탄을 투척하지요.

현장에서 일본군 헌병들에게 체포되고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 받습니다.

그리고 일본으로 끌려가서 그곳에서 사형을 당합니다.

 

 

 

 

1932년 12월19일 오전 7시40분, 일본 아카와현 미고우시 일본육군공병작업장에서 처형됩니다.

일본헌병이 쏜 총탄이 윤의사의 이마 한 가운데 관통한 처참한 모습의 현장사진 입니다.

 

 

1946년 6월30일, 극민장으로윤의사의 장례식이 치루어 집니다.

 

 

윤의사의 유묵(遺墨)들입니다.

 

 

윤의사 사진전시회의 사진들 가운데에서 윤의사 기념석물 사진들을 골랐습니다.

오른쪽 두개의 사진은 일본 가나자와시에 세워저 있는 '암장지적비'와 '순국기념비'입니다.

왼쪽 아래는 중국 상해 홍구고원에 세워저 있는  '의거현장 기념비'입니다.

 

 

기념관 옆에 윤의사의 동상이 세워저 있습니다.

그리고 숭모비도 세워저 있습니다.

 

 

윤의사 상해의거 60주년 기념사업으로 윤의사기념사업회가 1995년에 세운 윤의사 동상입니다.

조각가 심정수님의 작품입니다.

아래 숭모비는 상해의거 61주년 기념으로 1996년  세웠답니다.

 

 

윤봉길의사의 상해의거는

침체되어가던 대한 독립운동의 불씨를 되살리고

일제의 만행과 독립열기를 세계에 알렸으며

당시 악화되어 있던 한중관계를 동반자 관계로 재인식케되며 한중 공동의 항일운동으로 전개되는 계기가 마련됩니다.

한편 기세당당하던 일제는 전의를 상실케되고 침략전쟁을 포기하고 화해정책으로 돌아서는 계기를 조성시킴니다.

당시 중국의 장개석 총통은

"중국의 백만대군도 하지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해냈다."고 극찬을 하면서 임시정부를 적극 지원하여

상해 임시정부가 부활하게 되었었지요.

순국하신 25살 청년 윤봉길 의사의 숭고한 애국정신 앞에 겸허해 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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