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산반도 여행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 오면서 중간에 한곳을 더 들려보기로 했습니다.
지도를 펼치니 김제에 빨간색으로 '벽골제, 벽골제비'라고 인쇄되어 있네요.
궁금했습니다.
'벽골제' , '벽골제비'라니 도대체 이곳은 무었하는 곳일까?
한자로 토나 달려 있으면 해석이 가능할 터인데 한글로만 표기해 놓으니 해석이 어렵네요.
네비게이터에 '벽골제비'라고 찍고서 향했습니다.
그래도 네비게이터는 다 아는 모양입니다.
정확하게 정문앞에 내려 놓아 주네요.
넓은 광장에 들어서서 맨 처음 만난 것이 (위)벽골탑(碧骨塔)이고 그 옆의 (아래)성금탑이었습니다.
벽골제가 1963년에 사적 제111호로 지정된뒤 이 고장의 유지들과 관계자 그리고 출향인들의 성금으로
벽골제가 개발된 것을 기념해서 이 성금탑을 세운다고 했습니다.
'2001년 12월 20일 벽골제개발위원회'
그래도, 아직 벽골제가 무었인지 모르겠습니다.
넓은 광장을 지나 한참 저쪽에 '벽골제비'라는 것이 보존되어 있었습니다.
이 '벽골제비'옆에 세워진 안내판앞에 서서야 '벽골제'가 무었인지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벽골제'의 한문자 글씨를 처음 접했기 때문입니다.
'碧骨堤'였습니다.
'堤'자가 방죽'堤'자였습니다.
그러니까 '벽골(碧骨)'이라는 이름의 제방(堤防)이었습니다.
또 한글로만 표기해 놓아서 무었일까 궁금했던 '벽골제비'가 '碧骨堤碑'였습니다.
'벽골제방'에 대해 기록을 남긴 돌비석이었습니다..
'벽골제(碧骨堤)',
제천의 '의림지', 밀양의 '수산제'와 더불어 우리나라 3대 저수지 였답니다.
어린 학생때는 배워서 줄줄 외우고 다녔을성 싶은데....까맣게 잊고 있었나봅니다.
잠시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고 또 김제시민분들께 미안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더 열심히 둘러보고 더 열심히 공부를 했습니다.
마한(馬韓)시대에는 김제를 '벽비리국(벽卑離國), 백제(百濟)시대에는 '벽골군(碧骨郡)'으로 불렀답니다.
이는 '벼(稻)의 골'이라는 뜻으로 도향(稻鄕)의 이름 이랍니다.
이러한 지명(地名)의 연유로, 벽골제(碧骨堤)는 우리 고어(古語)로 '벼골의 둑'이 한자로 벽골제(碧骨堤)라 표기된 것은 이두표기에 기인한듯 하다네요.
(아래)'벽골제비(碧骨堤碑)'와 제방(堤防)입니다.
사적 제111호입니다.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비(碑)이고 제방을 고쳐쌓은 내력등을 새겼다고 하는데
마모가 심해서 알아보기가 어려웠습니다.
제방은 백제 비류왕 27년(330)에 쌓은 우리나라 최고, 최대의 제방이었답니다.
통일신라 원성왕(785-798)때 늘려 쌓았고 고려와 조선시대에 여러차레 수리하였답니다.
금만평야(金萬平野)를 비롯해서 정읍시, 부안군 등 일대의 1만ha농경지에 농업용수를 공급하였답니다.
원래 제방의 길이는 3.3km, 둑의 높이는 5.7km, 상단폭 10m, 하단폭 21m에 이르렀었다구요.
일제때 관개수로로 이용해서 원형이 크게 훼손되었다고 하는군요.
뚝방에 올라 저수지쪽을 내려다 보니 지금은 저수지가 아닙니다.
뚝방아래로 수로(水路)가 지나고 넓은 경작지가 펼처저 있네요.
차도(車道)가 지나고 집들도 보입니다.
그러니까, 아래 모형도 속의 벽골제 모습은 지금이 아니고
옛날 저수지의 역활을 활발하게 하던 백제,통일신라, 고려, 조선시대의 모습이 되겠습니다.
저 모형도 대로라면 수문이 다섯개나 되는 대단한 저수지였음이 틀림 없겠습니다.
'장생거(長生渠)'랍니다.
수문(水門)이었습니다.
수여거,장생거,중심거,경장거,유통거 등 전부 5개의 관문이 있었으나
지금은 '장생거'와 '경장거' 두곳만 남아 있답니다.
벽골제 수문 체험장(水門 體驗場)
양쪽 제방에 올라 동시에 물레를 돌리면 수문이 열린답니다.
월촌입석(月村立石)입니다.
전라북도 민속자료 제7호
김제시 입석동 입속마을에 세워저 있답니다.
입석(立石)은 마을의 입구에 세워져 재앙을 막아주는 수문신(守門神)이자
마을의 풍농과 평안을 지켜주는 수호신(守護神)이랍니다.
입석마을 에서는 매년 음력 정월 보름날 남녀편으로 나뉘어 '줄다리기'를 하는데
여자편이 이겨야 그해 풍년이 든다고 믿었다네요.
줄다리기가 여자편의 승리로 끝나면 사용한 동아줄을 입석에 감아두고
고을의 풍농과 안녕을 비는 당산제를 올렸답니다.
이 벽골제 사적지에서도 매년 '지평선축제'때 줄다리기를 한다네요.
'단야루(丹若樓)'와 '단야각(丹若閣)'입니다.
사적지로 조성하면서 최근에 세운 누각이고 사당입니다.
'단야'가 누구이기에 이곳에 사당과 누각을 지어 추모 할까요?
"통일신라 제38대 원성왕때 축조된지 오래된 벽골재를
토목기술자 '원덕랑'을 보내 보수공사를 하게 했답니다.
지역태수의 딸 '단야'가 원덕랑을 흠모하게 되었다네요.
한편, 큰 공사에는 용추에 제물을 바쳐야 공사가 순조롭다는 속설이 있었는데
이를 무시하고 공사를 진행해서 백성들 사이에서는 공사에 대한 우려가 높았었다구요.
그때 '원덕랑'의 약혼녀 '월내'가 김제 벽골제에 이르자,
태수는 딸' 단야'의 사랑을 이루어 주기 위하여 '월내'를 보쌈하여 제물로 바치고
보수공사도 완공시키겠다는 음모를 꾸몄다네요.
아버지의 계책을 눈치챈 '단야'는 자신을 희생하여 제방도 완성하고 '원덕랑'과 월내'를 결합시키고
아버지의 살인도 맊아야 겠다는 결심을 하고 용의 제물이 되었고 벽골제는 무사히 완공되었답니다."
이를 근거해서 이곳에 '단야각'을 세워 '단야'의 영정을 모시고 '단야루'를 세웠답니다.
벽골제 사적지안에는 '벽골제 농경문화박물관'이 있습니다.
그리고 벽천미술관(碧川美術館)도 있습니다.
그리고 또 농악전수관도 있습니다.
그리고 또' 전통 선비생활 테마마을'도 조성되어 있습니다.
유치원 학생들이 선비교육을 받고있더군요.
그리고 다음 순번 아이들도 눈망울을 굴립니다.
그리고 싸우는 '두마리의 용'은 가쁜 숨을 몰아 쉬는듯 살기가 넘침니다.
''소'테마공원'의 청동제품 소들도 여유로워 보이구요.
('한국의 조형미'란에 소들의 모습을 실었습니다.)
그리고 넓게 조성된 사적지 이곳 저곳에 농공문화의 단편들을 재현해 놓았습니다.
마침 김제지평선 축제가 끝난 모양입니다.
축제장의 시설들을 철거하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허수아비 인형들은 아직 서 있어서 사진에 담았습니다.
(자세한 사진들은 '한국의 전통미'란에 수록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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