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오며가며

광성보(廣城堡)

by 鄭山 2008. 10. 29.

 전에는 강화도로 들어가는 길이 48번 국도를 따라 연결되는 '강화대교'가  유일한  통로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초지진쪽에 다리가 하나 더 생겼지요.  '초지대교'입니다.

'강화대교'를 건너서 서쪽 해안도로를 따라 '초지대교'쪽으로 내려오다 보면

'광성보(廣城堡)'를 만납니다. 

 

 

 

'광성보'는 조선 효종 9년(1658)에 설치된 강화도 해안수비 진지 가운데 하나지요.

숙종 5년(1679)에 다시 진지 시설이 보강됩니다.

내성, 외성, 12진보, 53돈대로 축조, 요새화 되지요.

이때 이 보에 딸린 '광성돈대' 등3 개의 돈대도 함께 축조되어 소속됩니다.

 

그러니까 이 곳이, 신미양요(辛未洋擾, 1871)때 미군군대와 48시간에 걸친 사투의 현장이었던 곳이지요.

이때 전사한 중군(中軍) 어재연(魚在淵)장군을 기리는 전적비와  전사자들의 순국영령들을 기리기 위한

신미순의총(辛未殉義塚)도 1977년 정비됩니다.

사적 제227호입니다.

 

 

'광성보'의 누각입니다.

보수공사중 이로군요.

자주 찾는 곳이니 보수공사가 끝나는 대로 다시 촬영하여 대체하려 합니다. 

 

 

 

 '광성돈대(廣城墩臺)'입니다.

'광성보'에 속한 세개의 돈대가운데 하나지요.

숙종 5년(1679) 함경도, 황해도, 강원도의 승군(僧軍) 8,000여명과 어영군(御營軍) 4.300명이

40일만에 완공시켰답니다.

1977년에 포좌(砲座) 4개소와 포 3문이 복원, 설치되었다구요.

 

전시되어있는 큰 포(砲)는 대포(大砲)인데 홍이포(紅夷砲)라고도 한답니다.

화약이 폭발하는 힘으로 날아가는데 정작 포알은 폭발하지 않아서 위력은 약하다네요.

사정거리 700m 병자호란(丙子湖亂)때도 사용했었다구요.

그리고 중간의 전시되어 있는 소포(小砲)는 사정거리 300m, 포알은 대포와 같고 조준이 된답니다.

대포(大砲)는 조준이 안되구요.

그리고 작은 것은 '불랑기(佛狼機)'라고 하는데 프랑스군이 사용하던 것이라네요.

 

 

 

 

 

 

 

신미양요순국무명용사비(辛未洋擾殉國無名勇士碑)와 쌍충비각(雙忠碑閣)입니다.

 

 

 

 

쌍충비(雙忠碑)는 신미양요때 전사한 어재연(魚在淵)장군 등 순국장병59명의 순절비(殉節碑)입니다.

1기는 광성파수순절비(廣城把守殉節碑)이고  또다른 1기는 어재연, 어재순 형제의 순절비입니다.

고종때부터 제사를 지내왔고 1970년 부터는 어재연 장군의 후손들이 제사를 올려

충절의 유업을 추모하고 있답니다.

 

 

'신미순의총(辛未殉義塚)'입니다.

전사한 용사들의 무덤입니다.

당시 중군(중군) 어재연(어재연)장군을 비롯한 53인의 전사자 가운데 魚장군 형제는 고향인 충북 음성에 안장되고 남은 전사자 51명은 신원을 분별할수 없어 7기의 분묘(墳墓)에 합장하여  순절을 기리고 있답니다.

최후의 한사람까지 포로되기를 거부하고 결사항전(決死抗戰)한 살신호국(殺身護國)의 정신을 보여준

곳이랍니다.

 

 

 

 

 광성포대(廣城砲臺)입니다.

고종 11년(1874)에 용진, 광성, 덕진, 초지진에 포대를 각각 설치하였단는데 그중 한곳입니다.

2004년, 발굴조사를 통해 유적을 확인하고 복원 정비하였답니다.

 

 

'용두돈대'로 향하는 길목에 <손돌목, 손돌의 한숨.손돌의 추위>라는 제목의 설명판이 세워저 있습니다.

 

 

설명판의 글씨가 작아서 읽기가 힘들것 같습니다.

그대로 옮깁니다.

 

 [강화도는 한강 입구에 있는 섬이다. 그러나 여느 섬과는 달리 육지와의 사이를 흐르는 물길(염하)이 빠르고, 또한 밀물과 썰물의 차이가 심해서 여간 숙련되지 않은 뱃사공은 이 물결을 함부로 건너지 못한다.

인조 5년(1627), 후금(뒷날의 청)이 처들어 왔다. 임금이 서둘러 강화도로 피난길에 나섰을때

손돌이 길안내를 맡았다.

그러나 강화도로 가는 뱃길은 험했다.      급한 물살과 그에 따라 뒤집힐 것같은 배는 임금을 불안하게

만들었지만 손돌은 태연하게 노를 저어 점점 더 험한 물살의 가운데로 배를 몰아 갔다. 

임금은 속으로 '이 뱃사공이 나를 죽이기 위해 배를 이곳으로 모는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손돌을 죽이라 명령했다.

손돌은 죽기전에 말했다. "제가 띄우는 바가지가 흘러가는 곳으로 배를 몰고 가십시요. 그러면 안전하게

강화도에 도착할 것입니다."

손돌은 죽었고 바가지기 흘러가는 곳을 따라 가던 배는 강화도에 도착했다. 임금이 강화도에 발을 내딛자,

바람이 세차게 불었고 물길은 더욱 험해젔다. 임금이 천천히 말했다.

"으음, 내가 손돌을 의심하였구나. 나의 잘못이다. 여봐라. 손돌의 시신을 잘 거두어 후하게 장사를

지내도록 하라."

지금 강화도의 광성보에서 마주 보이는 김포의 덕포진(대곶면 신안리)에 손돌의 무덤이 있다.

사람들은 이 물길을 손돌의 목을 벤 곳이라 하여 손돌목이라 부른다.

손돌이 죽은 음력 10월20일에는 큰 바람이 분다고 한다. 이를 손돌의 한숨, 손돌바람, 손돌추위라 한다.]

 

(다음 사진) 용두돈대 앞의 '손돌목'물결입니다.

정말 물결이 거칠어 보이는군요.

기회가 되면, 김포쪽 반대편(대곶면 신안리)에 있다는 '손돌'의 무덤도 한번 찾아가 보아야 겠습니다.

 

 

 

 

 

 

'오며가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미시령  (0) 2008.11.07
용주사(龍珠寺)  (0) 2008.10.30
가을향기 국화꽃전시회  (0) 2008.10.29
김포쌀 홍보단지  (0) 2008.10.29
융릉(隆陵), 건릉(健陵)  (0) 2008.10.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