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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며가며

융릉(隆陵), 건릉(健陵)

by 鄭山 2008. 10. 28.

 

 

 

 

경기도 화성 용주사(龍珠寺) 가까운 곳에 융릉(隆陵)과 건릉(健陵)이 있습니다.

합해서 '융건릉(隆健陵)'이라고 부르지요.

'융릉'은 사도세자의 무덤이고 '건릉'은 '정조'의 무덤입니다.

 

 

 

먼저 오른쪽 '융릉(隆陵)'으로 향합니다.

'사도세자'의 무덤이라고 했습니다.

조선 제 22대 정조(正祖)의 아버지인 장조(莊祖,1735-1762)와 그의 비(妃)인 헌경왕후(獻敬王后,1735-1815))홍씨가 묻힌 합장릉(合葬陵)입니다,

 

 

 

 

 

이 능(陵)의 주인인 장조(莊祖)는 영조(英祖)의 둘째아들로 맏아들 진종(眞宗,孝章世子)이 요절하자

영조 12년 (1736)에 두살의 나이로 왕세자에 책봉되지요.

영조 25년(1749) 부왕을 대신해서 서정(庶政)을 하면서 정치적 견해를 달리하는 노론(老論)들과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貞純王后)김씨, 숙의(淑儀)문씨등의 무고(誣告)로

영조의 미움을 사 영조 38년(1762) 뒤주속에 갇혀 세상을 떠나지요.

그후 영조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뜻으로 사도(思悼)라는 시호(諡號)를 내립니다.

그의 아들 정조(正祖)가 즉위하자 장헌(莊獻)으로 추존되고

경기도 양주의 무덤에서 이곳으로 이장(移葬)되어 현륭원(顯隆園)이라 불리우다가

장조(莊祖)로 추존된뒤 융릉(隆陵)으로 높힙니다.

 

헌경왕후(獻敬王后) 역시  역사와 문학사에서 이름을 높히신 분이지요.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의 딸로 영조 20년(1744)에 왕세자빈으로 책봉이 됩니다.

사도세자가 세상을 떠난뒤 혜빈(惠嬪), 정조가 즉위하면서 혜경(惠慶)으로 올려젔고

그뒤 사도세자가 장조(莊祖)로 추존되면서 헌경왕후로 추존이 되지요.

한많은 일생을 자서전(自敍傳)적인 사소설체로 적은 '한중록(閑中錄, 궁중문학의 효시)'을 남기신 분입니다.

 

 

 이번에는 건릉(健陵)입니다.

조선 22대 정조(正祖,1776-1800)와 효의왕후(孝懿王后)의 합장릉(합장릉)입니다.

정조는 장조(莊憲世子, 思悼世子)의 아들로 영조 35년(1759)에 세손에 책봉이 되지요.

1762년 장헌세자가 비극의 죽음을 당하자 영조(英祖)의 맏아들 효장세자(孝章世子(후에 眞宗으로 추존)의

후사가 되어 왕통을 있습니다.

영조51년(1775년) 연로한 영조를 대신해서 대리청정(代理聽政)하였고 영조가 승하하자

1776년에 왕위에 오르지요.

규장각(奎章閣)을 설치하고 탕평책을 펼치며 조선후기 문예부흥기를 이룹니다.

 

 

 

 

 

왕릉에 닥아 설때마다  의문이 있습니다.

홍살문에서 정자각(丁字閣)까지 이르는 돌길의 높이가 세가지입니다.

가운데 길이 가장 높고 그 오른 쪽으로 중간 높이의 길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좌우로 낮은 길이 있습니다.

가운데 높은 길은 '신도(神道)'랍니다.

오른쪽 그 보다 조금 낮은 길은 '어도(御道)'이구요.

'신도(神道)'는 신(神)이 걷는 길이고 '어도(御道)'는 임금이 걷는 길이랍니다.

그러니까, 임금은 가마를 타고 와서 홍살문 안쪽 오른편의 '판위(板위)'에 내려 섭니다.

그리고 어도(御道)위를 걸어서 정자각(丁字閣) 으로 향합니다.

알고 걸으면 훨씬 보는 재미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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