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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제주의 성지, 황사평

by 鄭山 2009. 9. 20.

 

 

 

제주의 무명 순교자들이 잠들어 있는 무명 순교자 묘역입니다.

그리고 천주교 공원묘지입니다.

 

1886년 한불조약을 계기로 100년여에 걸친 천주교 박해정책은 끝나지만

지방에서는 소규모의 박해사건들이 빈발합니다.

더욱이 어떤 사건은 공식박해를 능가할 정도로 대규모로 진행되기도 했습니다.

그중의 하나가 1901년 신축년에 발발한 제주도 교난(敎案)사건입니다.

흔히 '신축년 제주도 민란'이라 불리우는 이 사건은 700여명의 교우를 포함해

모두 900여명의 희생자를 낸 엄청난 사건이였습니다.

민란이 일어난 1901년은 신앙의 자유가 허용된지 10년이 지났을 때였고

카토릭 선교사가 제주에 들어와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지 채 2년이 못된 때였습니다

 

선교사들이 토속신앙으로 행해지던 미신행위들을 근절시키고

여러가지 도덕적인 생활을 요구하는 천주교 교리를 전파하는 과정에서

외래종교에 대한 도민들의 반감이 생기게 됩니다.

구한말 왕실의 재정확보를 위한 과중한 조세정책이 또한 주민들에게 큰 부담이 되는 등,

여러가지 시대적 요인들로 제주도민 사회에는 외부세력에 대한 저항감이 팽배해 집니다.

지방의 토착관료들과 토호들 그리고 당시 제주에 진출해 어업 이권을 쥐고 있던 일본인 밀어업자들이 결탁해도민들을 규합해서  세무관리와 교회가 있는 제주읍성을 포위한채

닥치는대로 천주교인들을 잡아 죽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당시 라크루신부는  교우들을 이끌고 제주읍을 방어하는 한편

중국 상해에 주둔중인 프랑스 함대에 구원요청을 합니다. 

하지만 결국 제주읍성은 함락되고 많은 교우들이 관덕정에서 피살됩니다.

그후 프랑스공사가 조정에 편지를 보내 이 문제의 조속한 해결을 요구했고

천주교회는 조정으로부터 이곳 황사평땅을 보상받아

당시 희생되었던 무연고 28구의 유구들을 수습해 이곳에 안장을 합니다.

천주교 제주교구는 이곳을 무명 순교자 성지로 성역화를 합니다.

 

 

'성 가정상'이 우뚝 세워진 입구로 묘역을 들어 섭니다.

천주교 공원묘역이 펼처집니다.

 

 

순교자묘역입니다.

왼쪽에 제주 최초의 순교자 김기량(펠릭스 베드로)의 순교비가 보입니다.

1999년, 제주선교 100주년에 즈음해서 이곳에 순교비를 세웁니다.

 

  

 

그리고 오른쪽에 외국선교사 공덕비가 보입니다.

성직자 묘역도 조성되어 있구요.

1899년에 공식 설립된 제주교구는 초창기의 어려움 속에서도 외국인 선교사제들의 노력으로

터전이 잡혀 갑니다.

파리 외방전교회와 성 콜롬보 외방선교회 소속 성직자들이 그들입니다.

지난 100여년 동안 55명의 외국인 사제들이 사목활동을 했고 지금도 활동중입니다.

그 분들 가운데 이미 선종한 16분의 이름이 공덕비에 새겨저 있습니다.

그리고 초대 제주교구장 현 하롤드 대주교의 묘소도 보입니다.  

한국천주교의 새성경을 번역하고 탄생시킨 임승필(요셉)신부의 묘소 등 성직자들의 묘소도 함께 있구요.

 

 

 

그리고 벌초하러 묘지를 찾은 가족들의 모습들도 여기 저기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