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학교의과대학 정문 모습입니다.
지금은 원남동 창경궁쪽 문이 정문역활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옛날에는 이쪽이 정문이었던 싶습니다.
큰길과 개천을 건너서 바로앞에 서울대학교 본부와 문리과대학 정문이 마주하고 있었거든요.
지금은 대학본부와 문리대가 '마로니에'공원으로 바뀌었고 앞의 큰길을 '대학로'라 부르지만
그때는 혜화동에서 이화동-종로5가로 이어지는 큰길이었고
그 길을 가운데로 해서 서울대학교 단과대학들이 몰려 있었지요.
문리대, 의대, 법대, 수의대 등이 있었습니다.
의과대학구내도 이제는 건물이 무척 많아젔지만
옛날에는 사진속의 이 건물(의대)과 뒷쪽에 외래동 등 몇동의 벽돌건물이 전부였습니다.
나무가 울창했고 다람쥐들이 뛰어놀던 공원같은 곳이었지요.
의대정문이 추억의 장소인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읍니다.
대학시절을 건너편 문리과대학에서 보냈으니 매일 이 앞을 지나 다녔기도 했지만
그 보다 훨씬전 어렸을때 다니던 국민학교(초등학교)가 바로 이 의대와 담을 같이했던 창경국민학교 였고
살던 집 또한 문리대 뒤쪽 동숭동이다보니
일대의 주변이 모두 등하교 길목이었드랬지요.
거기다가 큰형이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이곳 병원에서 전문의 과정에 있었고
그렇다보니 드넓었던 병원정원도 하교길 놀이터 가운데 한곳이었던 기억입니다.
그리고, 형을 마지막으로 보았던 곳이 바로 이 병원정문 입니다.
1950년,순식간에 밀어닥친 인민군의 남침으로 서울은 적치하에 떨어젔고, 피난길은 엄두도 못냈었지요.
당시 인접 혜화동 로타리에 있던 서울여자의과대학 부속병원(훗날 우석의대,지금은 고대의대) 사무장이셨던 아버지가
놈들이 의사들과 간호원들 모두를 데리고 후퇴할것이라는 것을 눈치채시고
막내였던 내손을 잡고 이곳 정문 수위실에서 형을 면회했었지요.
놈들이 곧 철수를 할터이니 눈치봐서 탈출하라고 일렀고 형은 알겠다고 답하고 들어갔는데...
그것이 큰형의 마지막 뒷모습이었습니다.
북으로 납치되어 가신 것이지요.
지금도 이곳 의대 정문앞에 서면 큰형의 그때 그 모습이 나를 울립니다.
큰형은 당시 의대부속병원 2년차 레지던트과정이셨지요.
어느날 퇴근해서 맹장수술을 처음 해보았다며 그렇게 좋아하시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지금은 맹장수술 정도는 수술도 아니지만 그때만해도 무척 어려웠던 고난도의 수술이었는데
수련의에게 처음으로 집도를 맡겼고 그 일을 형이 성공적으로 마쳤다는 얘기였었지요.
그리고 큰형,
푸치니의 오페라 '토스카'의 삽입곡 '별은 빛나건만(E Lu cevan Le Stelle)'를 즐겨 부르시고
집안에 암실(暗室)까지 갖추어 놓고 사진작업까지 하던
멋쟁이 형님이셨습니다.
형님이 사용하시던 브로니판 '로라이플랙스(Rollei Flex)'카메라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이 납니다.
보고싶습니다.
이화동족으로 또하나 문이 생겨있군요.
옛날에는 없던 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