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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며가며

서정주의 집

by 鄭山 2011. 4. 22.

 

 

 

미당(未堂) 서정주(1915-2000)시인의 서울 남현동 집이 옛 모습 그대로 단장을 마치고 일반에게 공개되었다고 해서 찾아가 보았습니다.

서울지하철 2,4호선 6번 출구로 나와서 사당초등학교를 찾아 갑니다.

사당초등학교 뒷편 입니다.

 

옛날, 이곳은 '예술인마을'이라는 동네 였었지요.

주변에 온통 미당의 집과 닮은 집들이 들어차 있었는데 미당의 집만 남기고 모두 재건축되어

다가구주택, 연립주택 등 큰 건물들로 바뀌어 있군요.

집안으로 들어서니 택호(宅號) '봉산산방' 안내판이 맞아주는군요.

 

 

우리시대의 여늬 2층집과 다를바 없는 집입니다.

거실 큰 창문을 지나면 현관이 있고 현관에 들어서면 거실과 부억 그리고 안방과 또다른 방이 있습니다.

물론 거실에는 소파가 놓여 있구요.

 

 

현관으로 들어섭니다.

 

노(老)시인 부부의 따스한 미소가 방문객을 맞이합니다.

그리고 시인이 직접 그렸다는 집의 평면도가 눈에 들어 옵니다.

이 집은 미당이 교수시절, 월급을 절약해 나무와 돌들을 사 모아서 만든 집이라고 했었지요.

 

 

 

거실과 부엌, 안방입니다.

 

2층으로 향한 계단으로 오릅니다.

 

 

두개의 방이 마주하고 있고 그 가운데 오른쪽 큰방이 시인의 서재였다구요.

시인이 앉아서 책을 읽고 시(詩)를 쓰셨다던 탁자와 의자가 보입니다.

평소에는 이곳 2층 서재에서 주로 생활을 하셨으나 말년에는 윗사진 설명문처럼 아랫층 안방에서 지내셨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서재 건너편 방입니다.

 

 

시인이 생전에 쓰시던 붓과 벼루 등 문구류와 2층 서재에서 부인에게 부탁할 일이 있을때 불었다던 스위스제 뿔나팔,

'미당'이라는 호(號)를 지어주었다는 중앙고보 선배 배상기의 양어머니 최상궁으로부터 선물받았다는 호박(琥珀)염주 등

사연깊은 유품들이 여러점 전시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2층 거실에는 시인의 시집과 외국에서 번역, 출판된 시집 들이  전시되고 있슨다.

시인의 흉상도 모셔저 있구요.

 

 

 

시인은 한국시(詩)의 '큰 산맥'이었습니다.

1915년 이 땅에서 태어나 85년을 살다간 시인,

70년에 이르는 긴 창작 기간동안 천여 편의 시를 남겼습니다.

 

 

정원은 과거와 많이 달라젔습니다.

나무와 돌이 빽빽하게 차있던 옛 정원의 모습은 볼수가 없습니다.

대신 새로 심은 소나무와 후박나무, 모란, 라일락 등 몇그루 나무들과  현대판 4각 덕대, 철제의자 들이 들어서 있습니다.

계속해서 시인 부부가 정원을 배경해서 찍은 사진을 첨부합니다.

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차 있고 큰 들도 보입니다.

그리고 개집도 하나 보입니다.

 

 

1988년 미당 시집 '팔할이 바람'가운데 이런 글이 나옵니다.

"그리하여 이 관악산 밑의 내 집 봉산산방에서 내가

새로 시작한 일은

호주머니 사정이 허락하는 대로

여러가지 꽃나무들과 여러 모양의 바윗돌들을 모아

이것들의 모양과 빛깔들을 늘 대조해 보며

조끔치라도 더 나은 조화를 이루게

배치해 보고 또 고쳐 배치해 보고 하는 일이었네.

사군자를 비롯해서 소나무, 모과나무, 살구와 감과 대추나무,

산사와 후박과 해당화, 군해당화, 등나무, 영산홍과

영산백(白)과 영산자(紫),

(중략)

이런 몇 해 동안의 내 몰입은

그 뒤의 내 시상 구성에도

은연중 작용해떤 것 같네."

 

그리고 또 산문집 '미당산문'(93년)에는 이런 대목의  글도 나옵니다.

"8만원도 안되는 대학교수 월급을 절약해 '백 몇십 그루쯤의 나무'와  '열 트럭쯤의 바윗돌들'을  몇년간에 걸쳐 사 모은 후

70평 넓이의 마당에 심고 배치했다."

시인의 정원가꾸기는 가벼운 호사취미가 아니었던 듯 싶습니다.

 

그런데... 개조된 정원에는 시인의 따뜻하고 인간적인 체취와 흔적이 모두 지워지고 없습니다.

'미당 북까페'를 설치해서 문화행사 장소로 활용할 계획으로 저렇게 바꾸어 놓았다는데.....아쉽습니다.

북까페를 만들려면 옆집을 더 얻어 별도로 준비했으면 좋았을 것을

시인의 오롯한 흔적들을 지워버리고

그 자리에 대신 현실적 필요와 욕구로 채워 놓다니..아깝습니다.

안방에서도 똑같은 허탈을 봄니다.

여늬 여염집 부인들과 마찬가지로 부인께서이쓰셨을 자개장농은 보이지 않고  박물관형 유리박스가  장농자리를 채우고 있습니다.

두루마기 등등 시인의 옷들만이 박물관처럼 덩실하게 매달려 있습니다.

이 집은 미당의 집이면서 평생을 함께 했던 부인 방옥숙 여사의 집 입니다.

안방은 부부의 공간이자 안주인의 전용공간입니다.

부부의 사랑이 함께 묻어 나와야 그것이 '집'이 아닐까 생각해 봄니다.

흔히 존경받던 옛어른들의 생가를 복원한다면서

오늘의 자재와 오늘의 시선으로 개조된 흔적들을 보면서 마음 아파 했는데...

복원된 '미당의 집'에서도 부분적이기는 하지만 작은 아쉬움을 느낌니다.

 

(이제는 없어저 아쉽기만한) 미당의 정원 앞에서 노(老)시인 부부의 따뜻한 미소를 다시 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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